지난번 글에서 1985년 일본과 2026년 한국을 나란히 놓고, 한 가지 차이를 짚었습니다. 미국이 한국 반도체를 대하는 방식이 '배제'가 아니라 '유치'에 가깝다는 것이었죠. 러트닉 상무장관의 발언도 자세히 보면 "만들지 마라"가 아니라 "미국에서 만들어라"였습니다.
그 추상적인 이야기가, 지난 며칠 사이 아주 구체적인 장면으로 나타났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
7월 24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AI 서밋'이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한국 기업들과 글로벌 빅테크 사이에 대규모 협력 방안이 발표됐습니다. 청와대가 밝힌 전체 규모는 약 9,500억 달러(약 1,375조원)입니다.
다만 이 숫자는 확정된 투자액이 아니라, 업무협약(MOU)과 장기 협력 계획을 합친 것입니다. 실제 계약과 공급은 앞으로 프로젝트 진행에 따라 순차적으로 이뤄집니다. 그러니 "1,375조원이 투입됐다"가 아니라 "그 규모의 협력을 추진하기로 했다"가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 구분을 염두에 두고 개별 내용을 보겠습니다.
협약의 핵심 — 메모리를 넘어 파운드리로
가장 눈에 띄는 건 삼성전자와 브로드컴의 협약입니다. 두 회사는 향후 5년간 2,000억 달러(약 290조원) 규모의 협력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내용이 중요합니다.
삼성전자는 브로드컴에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4·HBM4E)를 공급합니다. 여기까지는 기존의 '메모리 강국' 한국이 해오던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하나가 더 붙었습니다. 삼성이 2나노 이하 첨단 파운드리 공정으로 브로드컴의 AI칩을 직접 생산하기로 한 것입니다. 생산 거점으로는 삼성의 평택 캠퍼스가 거론됩니다.
브로드컴은 구글 같은 빅테크의 맞춤형 AI 반도체(ASIC)를 설계하는 회사입니다. 즉 미국이 설계한 AI칩을, 한국이 자국 땅에서 만드는 구조입니다. 메모리만 팔던 데서, 파운드리(위탁생산)까지 영역이 넓어진 셈입니다.
SK그룹도 엔비디아 등과 향후 5년간 7,500억 달러 규모의 첨단 메모리 장기 공급 협력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SK하이닉스의 HBM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데이터센터라는 또 다른 축
협력은 칩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발표에 따르면 총 5기가와트(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와 약 200만 장의 GPU를 기반으로 한 투자 협력이 추진됩니다. SK텔레콤은 엔비디아와 최대 2GW 규모 데이터센터 구축에 협력하고, 엔비디아의 차세대 GPU 플랫폼 '베라 루빈'을 우선 공급받기로 했습니다. 네이버는 엔비디아·브룩필드와 함께 약 100억 달러 규모의 AI 데이터센터 확장을 추진합니다.
이 대목은 지난 버핏의 알파벳 투자 글, 그리고 AI 데이터센터 붐 글과 곧바로 이어집니다. 하이퍼스케일러들이 AI 인프라에 쏟아붓는 막대한 자본지출(CAPEX), 그 돈이 흘러가는 종착지 중 하나가 바로 한국의 메모리와 데이터센터라는 것입니다. 알파벳이 CAPEX를 100% 늘리고, 그 지출이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면 — 이번 발표가 그 답의 일부를 보여줍니다.
1985년 일본과 무엇이 다른가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985년 일본은 미국에게 눌러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환율(플라자 합의)과 관세(100% 보복관세)로 경쟁력을 꺾었고, 그 자리를 다른 나라가 채웠습니다. 배제의 논리였습니다.
2026년의 이번 장면은 결이 다릅니다. 미국 빅테크가 한국 기업과 손을 잡고, 한국은 미국이 설계한 칩을 만들고, 미국의 GPU로 한국에 데이터센터를 짓습니다. 이건 눌러서 밀어내는 그림이 아니라, 공급망 안으로 끌어당기는 그림에 가깝습니다.
지난 글에서 짚은 "배제가 아니라 유치"라는 관찰이, 이번 협약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 셈입니다. 미국은 여전히 관세라는 지렛대를 쥐고 있지만, 그 목적이 한국을 시장에서 몰아내는 게 아니라 미국 중심의 AI 공급망 안에 자리를 잡게 하는 데 있다는 점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봐야 하나
물론 신중해야 합니다.
첫째, 발표된 규모의 상당 부분은 아직 MOU와 계획입니다. 실제 계약으로 얼마나, 언제 이어질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합니다. 큰 숫자가 발표될 때일수록 "확정된 것"과 "추진하기로 한 것"을 구분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둘째, 협력의 방향과 주가의 방향은 다른 문제입니다. 한국이 미국 중심의 AI 공급망에 자리를 잡는다는 건 분명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반도체 업종의 반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시장 변동성 글에서 다뤘듯, 지금 시장에는 파생상품이 만든 수급 왜곡, 그동안의 상승에 따른 가격 부담, 매크로 환경의 변화가 얽혀 있습니다.
특히 가격 부담은 숫자로도 드러납니다. 지난 1년간 삼성전자는 약 490%, SK하이닉스는 약 1,030% 올랐습니다. 7월에는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를 제치고 코스피 시가총액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25년여 만의 일입니다. 두 종목의 합산 시총은 한때 코스피 전체의 절반을 넘어섰습니다. 이 정도 상승과 쏠림 뒤에는, 좋은 뉴스가 나와도 차익 실현 매물이 먼저 나올 수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 쏠림을 2000년 닷컴 버블에 빗대기도 합니다. 당시 시스코가 마이크로소프트를 제치고 나스닥 시총 1위에 오른 직후 거품이 꺼졌다는 것이죠. 다만 지금의 반도체는 그때와 달리 실제 이익이 뒷받침된다는 점에서 단순 비교는 무리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결국 이익이 언제까지 늘어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번 협약은 반도체를 둘러싼 큰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 흐름이 곧바로 다음 주 주가 반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협약에도 불구하고 아직 시장은 반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만큼 기대감과 피크아웃 우려가 혼재돼 있다는 뜻이겠죠.
본 글은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투자 자문이 아닙니다. 언급된 사실과 수치는 청와대 브리핑 및 각 기업 발표, 언론 보도(2026년 7월 24~25일)에 근거하며, 발표된 협력 규모의 상당 부분은 업무협약(MOU) 및 장기 계획으로 실제 이행은 향후 진행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특정 종목의 매수·매도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과 책임은 이용자 본인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