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효율'이었습니다. 어디에서 가장 싸게 만들 수 있는지, 어디에서 가장 싼 원료를 구할 수 있는지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생산은 중국으로 몰렸고, 에너지와 원자재는 국경을 넘어 가장 효율적인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이 질서가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가격만이 아닙니다. 누가 에너지를 공급하는가. 누가 핵심광물을 정제하는가. 그리고 내가 어느 공급망 블록에 들어가 있는가.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반도체와 AI를 넘어 에너지와 광물까지 확장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두 나라가 서로 다른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석유와 천연가스, 금융시스템, 그리고 첨단기술에서 강합니다. 반면 중국은 희토류, 흑연, 갈륨을 비롯한 핵심광물의 정제·가공 단계에서 압도적인 지배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벌어지는 공급망 전쟁을 단순히 '탈중국'이라고만 보면 절반만 보는 셈입니다.
1. 'Drill, baby, drill'은 단순한 석유 증산 구호일까
트럼프 대통령이 반복해 사용하는 유명한 구호가 있습니다. Drill, baby, drill. 말 그대로 석유와 가스를 더 많이 생산하자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책을 보면 단순히 휘발유 가격을 낮추거나 석유업계의 표를 얻기 위한 국내 정치 구호라고만 보기 어렵습니다.
2025년 2월 트럼프 대통령은 아예 국가 에너지 지배력 위원회(National Energy Dominance Council)를 신설했습니다. 당시 행정명령은 에너지 생산 확대의 목적을 물가 안정이나 일자리 창출뿐 아니라 미국 제조업의 부활, AI 경쟁력, 국가안보, 외교적 영향력 강화와 직접 연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한 표현도 단순한 에너지 자립(Energy Independence)이 아닙니다. 에너지 지배력(Energy Dominance)입니다.
그리고 미국은 이런 전략을 실행할 수 있는 물리적 기반도 이미 갖고 있습니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미국의 2025년 원유 생산량은 하루 평균 1,360만 배럴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습니다. 2018년 이후 미국은 계속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 자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천연가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EIA는 미국 LNG 수출량이 2025년 하루 약 150억 입방피트에서 2026년 약 170억 입방피트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즉 미국은 이제 단순한 에너지 소비국이 아닙니다. 세계 최대 산유국이면서 동시에 글로벌 에너지 공급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수출국이 됐습니다. 이것이 'Drill, baby, drill'을 지정학적으로 볼 필요가 있는 이유입니다.
2. 미국이 겨누는 곳에는 중국의 에너지 공급망이 있다
중국은 세계 최대 수준의 에너지 소비국이면서 동시에 원유 수입 의존도가 매우 높은 국가입니다. 그런데 중국의 원유 공급망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구조가 보입니다.
EIA에 따르면 중국의 주요 원유 공급국은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오만, 말레이시아 등입니다. 2024년 기준 러시아산 원유 수입은 하루 약 220만 배럴, 사우디산은 약 160만 배럴이었습니다.
여기서 '말레이시아'가 특히 흥미롭습니다. 중국이 말레이시아에서 수입한 것으로 집계되는 물량이 말레이시아 자체 생산량보다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EIA는 그 차이의 상당 부분이 이란산 원유가 환적되거나 원산지가 변경돼 들어오는 물량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중국은 공식 공급국뿐 아니라 러시아·이란·베네수엘라 같은 제재 대상국의 할인 원유도 적극 활용해왔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바로 이 지점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3. 이란 : 이제 공급자가 아니라 '중국 구매자'를 때린다
이란은 미국의 에너지 제재 전략을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사례입니다.
예전 제재의 중심은 이란이었습니다. 이란 기업을 제재하고, 이란 선박을 막고, 이란산 원유 거래를 제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한 단계 더 들어갔습니다. 이란산 원유를 실제로 사주는 중국 기업을 직접 제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미 재무부에 따르면 중국은 이란 원유 수출량의 약 90%를 구매하고 있으며, 상당 부분을 산둥성 일대의 독립 정유업체, 이른바 '티팟(teapot) 정유사'들이 처리하고 있습니다. 미 재무부는 이란산 원유를 처리해온 산둥 일대의 독립 정유업체들과 이란산 원유를 운송하는 선박·해운기업 수십 곳을 잇달아 제재 명단에 올렸고, 중국으로 향하는 운송 네트워크에 대한 추가 제재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미국은 이란의 석유를 단순히 땅속에 묶어두려는 것이 아니라, 이란산 원유를 사주는 중국의 정유·운송·결제망까지 공격하고 있습니다. 석유 공급자가 아니라 구매자와 물류망까지 압박하는 것입니다. 이건 단순한 대이란 제재를 넘어 중국의 저가 에너지 조달능력과 연결됩니다.
4. 베네수엘라 : 원유를 막기보다 '거래의 통제권'을 가져온다
베네수엘라도 흥미롭습니다.
베네수엘라는 약 3,030억 배럴의 확인 원유 매장량을 보유한 세계 최대 매장국입니다. 다만 생산량은 오랜 투자 부족과 제재로 하루 약 110만 배럴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과거 미국 제재 이후 베네수엘라 원유 상당량은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2025년 말에는 베네수엘라 수출 원유의 80% 이상이 중국으로 향했다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2026년,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출발점은 1월의 정변입니다. 1월 3일 미군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생포했고, 델시 로드리게스 부통령이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이후 미국은 베네수엘라가 보유한 3,000만~5,000만 배럴 규모의 원유를 넘겨받아 국제시장에 판매하고 수익금 분배를 미국 정부 재량으로 결정하는 데 베네수엘라 정부와 합의했으며, 이 판매가 "무기한"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협상 과정에서 베네수엘라에 중국·이란·러시아·쿠바와의 경제협력 중단을 요구한 것으로도 전해집니다.
이후의 제도 설계가 시사적입니다. 미 재무부 OFAC는 미국 기업들이 베네수엘라 원유의 구매·운송·정제·판매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일반 허가(General License)를 확대했습니다. 동시에 중국·러시아·이란 관련 기업이 직접 참여하는 거래에는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부분은, 중국계 기업의 직접 참여는 제한하면서도 미국 기업이 확보한 베네수엘라산 원유를 이후 중국에 재판매하는 것 자체는 금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셰브런, BP, 에니, 셸, 렙솔 등 글로벌 에너지기업의 베네수엘라 사업 참여도 다시 허용했습니다.
이 구조가 말해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미국이 원하는 것이 반드시 "중국에 베네수엘라 석유를 한 방울도 주지 않겠다"는 아닐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원유의 거래를 통제하고, 누가 금융과 운송을 관리하며, 누가 그 과정에서 영향력을 가지느냐입니다. 베네수엘라 정책은 단순한 에너지 봉쇄라기보다, 에너지 흐름을 미국이 통제할 수 있는 제도권으로 다시 끌어들이는 과정으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해 보입니다.
5. 러시아 : 중국에는 오히려 '할인 원유 공급자'가 됐다
러시아는 조금 다르게 봐야 합니다.
서방의 러시아 제재 이후 러시아산 원유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판매처가 유럽에서 중국과 인도로 이동했습니다. EIA에 따르면 중국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은 2024년 하루 약 220만 배럴까지 늘었습니다. 서방 제재로 러시아산 원유가 할인 판매되면서 중국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공급원이 됐습니다.
따라서 "미국이 러시아 원유를 막아 중국의 에너지 공급을 차단하고 있다"고 표현하면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구조는 이렇습니다. 서방은 러시아의 에너지 수익을 제한하려 하고, 러시아는 할인된 가격으로 아시아 시장에 판매하며, 중국과 인도가 저가 원유를 확보합니다. 러시아 제재는 러시아의 수익성을 낮추는 효과가 있지만, 동시에 중국에는 저가 공급원을 만들어주는 역설도 존재합니다.
다만 최근에는 이 그림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장거리 드론으로 러시아의 정유시설과 수출 터미널을 지속적으로 타격하면서, 블룸버그에 따르면 러시아의 정유 생산량은 2002년 이후 24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결과 기묘한 장면이 나왔습니다. 세계 2위 산유국 러시아가 휘발유 수출을 금지하고 거꾸로 연료를 수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로이터에 따르면 지난달 말에는 한국산 정유제품 3만 톤을 실은 유조선이 울산항을 출발해 러시아 극동으로 향했습니다. 러시아가 한국산 정유제품을 수입한 것은 2022년 이후 처음입니다.
원유는 팔 수 있지만 정제 능력이 무너지고 있는 것, 이것이 지금 러시아 에너지 산업의 실상입니다. 미·중 에너지 경쟁이 단순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6. OPEC에도 균열이 생기고 있다
2026년 글로벌 석유시장에서는 또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UAE가 OPEC과 OPEC+를 탈퇴한 것입니다.
UAE는 오랫동안 생산능력 확대를 추진해왔지만 OPEC의 생산쿼터에 묶여 있었습니다. UAE는 2027년 원유 생산능력을 하루 500만 배럴까지 높이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고, 이 전략이 OPEC의 감산 중심 정책과 계속 충돌해왔습니다. 결국 4월 말 탈퇴를 발표하면서 UAE 에너지 장관은 "사우디를 포함해 어떤 나라와도 사전 협의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UAE의 탈퇴를 공개적으로 환영하며 유가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것을 곧바로 'OPEC 붕괴'라고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OPEC 체제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미는 분명합니다. 산유국이 반드시 사우디 중심의 생산쿼터 체제에 남아야 한다는 전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기록적인 원유 생산과 UAE 같은 산유국의 독자노선이 동시에 나타난다면, OPEC이 과거처럼 공급을 조절해 가격을 통제하는 힘은 장기적으로 약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아직 확정된 결과라기보다 투자자가 지켜봐야 할 변화라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7. 그런데 중국에도 미국이 쉽게 대체할 수 없는 무기가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미국이 에너지 패권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중국도 매우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핵심광물의 정제와 가공능력입니다.
| 구분 | 미국 | 중국 |
|---|---|---|
| 에너지 | 원유 세계 최대 생산 1,360만 b/d LNG 수출 확대(150억 → 170억 cf/d) |
원유 수입 의존 러시아·사우디·이란산에 의존 |
| 핵심광물 | 수입 의존 | 갈륨·흑연·망간·희토류 정제 90% 이상 |
| 금융·기술 | 달러 결제 시스템 · 반도체 장비 · AI | — |
| 실제 사용례 | 이란산 원유를 사는 중국 정유사 제재 베네수엘라 원유 거래의 통제권 확보 |
중희토류 7종 수출통제(2025.4) 배터리 소재·제조장비 통제(2025.10) |
출처 : 미 에너지정보청(EIA) · 국제에너지기구(IEA) Critical Minerals Outlook · 미 재무부(OFAC)
IEA의 2026년 핵심광물 전망(Critical Minerals Outlook)을 보면 공급망 집중도는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핵심 에너지 광물의 최대 정제국 점유율은 2020년 평균 68%에서 2025년 70%까지 높아졌습니다. 니켈의 최대 정제국은 인도네시아이고, 대부분의 다른 핵심광물에서는 중국이 지배적입니다.
특히 일부 광물의 집중도는 충격적입니다. IEA에 따르면 중국은 갈륨, 흑연, 망간, 희토류 등 일부 핵심 소재에서 세계 정제 공급의 90% 이상을 차지합니다.
문제는 이 광물들이 단순한 전기차 소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갈륨과 게르마늄은 반도체·광통신·방산에 사용되고, 희토류는 전기차 모터·로봇·풍력터빈·군수산업에 들어갑니다. 흑연은 배터리 음극재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공급망 패권전쟁의 구조는 아주 흥미롭게 대칭을 이룹니다. 석유와 LNG에서는 미국이 강하고, 핵심광물의 가공과 정제에서는 중국이 강합니다.
8. 중국도 이미 핵심광물을 '협상 카드'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가능성이 아닙니다. 이미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IEA에 따르면 2023년 이후 중국의 수출통제 대상 광물 관련 품목 수는 약 3배로 증가했습니다. 2025년 4월 중국은 7개 중희토류에 대한 대규모 수출통제를 시행했고, 그 결과 일부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이 생산량을 줄이거나 일시적으로 공장을 멈추는 상황까지 발생했습니다.
2025년 10월에는 통제 범위를 배터리 양극재, 양극재 전구체, 흑연 음극재, 배터리 제조 장비·기술 등으로 확대하는 조치도 발표했습니다. 일부 조치는 2026년 11월까지 유예됐지만, 공급망 취약성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IEA는 배터리급 흑연 거래가 완전히 중단될 경우 중국 밖에서 연간 3,000억 달러 이상의 다운스트림 생산이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추산합니다.
즉 미국이 석유·LNG·달러·반도체 기술을 가진다면, 중국은 희토류·흑연·갈륨·배터리 소재·정제능력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9. 진짜 변화는 '자유무역 → 공급망 블록화'
그래서 저는 현재의 변화를 단순한 미중 무역전쟁보다 한 단계 크게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글로벌 경제의 핵심 질문은 "어디에서 가장 싸게 만들 수 있는가"였습니다. 앞으로는 다른 질문이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만든 것인가. 어느 기업이 가공했는가. 어떤 광물이 들어갔는가. 그리고 그 기업은 어느 국가와 연결돼 있는가.
이미 미국의 세제에서도 이런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2025년 OBBBA 이후 미국은 일부 에너지·배터리 관련 세액공제에 금지외국기업(PFE, Prohibited Foreign Entity)과 '중대한 지원(material assistance)' 규정을 도입했습니다. 2026년 미 재무부와 IRS는 45X 등의 세액공제에서 금지된 외국기업의 지원이나 소재가 어느 정도 포함됐는지를 계산하는 비율 기준 가이드라인까지 발표했습니다.
이제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는 기업은 단순히 "한국에서 만든 배터리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들어간 소재의 공급망까지 추적해야 합니다.
10.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이 가장 어려워진다
한국은 이 공급망 전쟁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미국은 안보동맹이자 핵심 수출시장입니다. 하지만 중국은 한국 제조업과 깊게 연결된 핵심 소재·부품·생산기지입니다. 특히 배터리와 반도체가 그렇습니다.
11. 배터리 : 가장 먼저 공급망 시험대에 오른 산업
배터리는 이미 공급망 재편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전기차 배터리는 광산 → 정제 → 양극재·음극재 → 셀 → 완성차라는 긴 공급망을 거칩니다. 문제는 중국의 경쟁력이 광산만이 아니라 정제·소재 단계에 집중돼 있다는 점입니다. IEA는 글로벌 핵심광물 공급망에서 정제와 소재 생산의 높은 중국 집중도가 여전히 가장 큰 공급망 리스크 중 하나라고 지적합니다. 특히 흑연 정제는 중국 점유율이 90%를 넘습니다.
한국의 상황은 더 구체적입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은 배터리 음극재의 핵심 소재인 흑연을 천연흑연 기준 97.2%, 인조흑연 기준 95.3% 중국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전량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시한이 붙어 있습니다.
미국 IRA의 전기차 보조금(최대 7,500달러)을 받으려면 배터리 핵심 광물을 해외우려기관(FEOC), 사실상 중국에서 조달하면 안 됩니다. 다만 흑연은 원산지 추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재로 분류돼 이 규정의 적용이 2년간 유예됐는데, 그 유예가 2026년 말에 끝납니다. 배터리와 전기차 기업들은 2026년 말까지 FEOC 규정을 준수하기 위한 계획을 담은 보고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해야 합니다.
흥미로운 우연이 하나 있습니다. 앞서 본 중국의 배터리 소재 수출통제 일부도 2026년 11월까지 유예돼 있습니다. 즉 미국의 유예도, 중국의 유예도 올해 말에 끝납니다. 양쪽의 시계가 같은 시점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97%를 중국에 의존하는 소재를 두고, 미국은 "중국산을 쓰지 말라"는 시한을, 중국은 "언제든 잠글 수 있다"는 통제를 동시에 걸어둔 상태로 2026년 말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 배터리 업체의 탈중국 전략은 단순히 "호주에서 리튬을 사면 된다"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광물을 캐는 곳과 배터리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정제하는 곳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공급망 다변화 비용이 높은 이유입니다.
12. 반도체 : 중국 공장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전략이 됐다
반도체는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서 낸드를 생산하고 있고, SK하이닉스는 우시에서 D램을 생산합니다. 과거에는 두 기업이 미국의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지위를 통해 미국산 반도체 장비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중국 공장에 들여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상무부는 2025년 이 VEU 지위를 폐지했습니다. 현재 미국 정부는 기존 공장의 운영에 필요한 장비는 허가할 수 있지만, 중국 내 생산능력 확대나 첨단기술 업그레이드를 위한 장비 반입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2026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 공장 운영에 필요한 미국산 장비에 대해 연간 라이선스를 받았습니다.
즉 당장 공장 가동이 막힌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과거처럼 장기적인 예외가 보장되는 구조에서, 매년 미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구조로 바뀌었습니다.
최근에는 더 흥미로운 움직임도 나타났습니다. 로이터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 장비 규제 리스크에 대비해 중국 AMEC 장비를 테스트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양사는 중국 공장 도입 목적의 테스트라는 부분은 부인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공급망 압박이 기업의 장비 선택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보여줍니다.
13. 한국 기업이 살아남으려면 '탈중국'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답은 무조건 중국을 버리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봅니다. 중국이 지배하는 소재·정제 생태계를 단기간에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여전히 거대한 소비시장입니다.
따라서 한국 기업의 전략은 '차이나 엑시트(China Exit)'보다 '차이나 헤지(China Hedge)'에 가까워야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네 가지입니다.
첫째, 비중국 공급망 다변화입니다. 호주·캐나다·칠레·아르헨티나·인도네시아 등으로 광물 조달선을 확대해야 합니다. 하지만 채굴만 확보해서는 부족합니다. 정제·가공·소재까지 이어지는 공급망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전략이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는 증거가 이미 있습니다. 갈륨과 게르마늄입니다. 중국이 2023년 갈륨 수출 통제를 발표한 직후 한국의 중국산 갈륨 수입 비중은 2024년 73.6%까지 올라갔지만, 2025년에는 26.0%로 떨어졌습니다. 부족한 물량은 독일, 미국, 일본이 나눠 공급했습니다. 게르마늄도 같은 기간 59.3%에서 14.8%로 낮아졌고, 캐나다가 수입의 70.7%를 차지하는 최대 공급국이 됐습니다. 외교 전문지 디플로맷은 중국의 수출 통제가 오히려 한국 기업들의 공급망 재편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습니다. 다변화가 물리적으로 가능한 품목에서는 2년 만에 의존도를 3분의 1로 줄인 실적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모든 광물이 갈륨처럼 풀리지는 않습니다. 인듐은 중국이 세계 생산의 약 70%를 차지하고 한국의 중국산 비중이 94.2%에 이르며, 흑연은 정제·가공을 중국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습니다. 핵심광물 리스크는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품목별로 대체가 되는가를 따져야 하는 문제입니다.
둘째, 소재 대체와 기술 혁신입니다. 특정 광물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입니다. 배터리 화학체계 변화, 희토류 저감형 모터, 소재 사용량 절감 기술이 지정학적 경쟁력이 됩니다.
셋째, 리사이클링입니다. 폐배터리에서 리튬·니켈·코발트·흑연을 다시 확보할 수 있다면 광산과 정제시설에 대한 해외 의존도를 줄일 수 있습니다. 재활용은 앞으로 환경정책이 아니라 자원안보 산업으로 봐야 할 가능성이 큽니다.
넷째, 미국 현지 생산과 합작입니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이 미국 현지 생산기지를 늘려온 것도 단순히 물류비 절감 때문만은 아닙니다. 미국의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확보하고, 미국 공급망 블록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의미도 큽니다.
14. 그런데 한국이 놓치면 안 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미국 공급망에 들어간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미국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새로운 리스크가 발생합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보조금, 관세, 원산지 규정, 투자 조건, 수출통제가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중국 공장에 대한 미국 정책도 불과 몇 년 사이 포괄적 예외에서 VEU로, VEU 폐지로, 다시 연간 라이선스로 계속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공급망 다변화라는 말은 '중국에서 미국으로' 모든 것을 옮긴다는 뜻이어서는 안 됩니다. 진짜 다변화는 미국이 막아도 버틸 수 있고, 중국이 막아도 버틸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15. 석유는 미국이, 핵심광물은 중국이 쥐었다
결국 지금 글로벌 경제에서 벌어지는 일은 상당히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 광물 | 중국산 비중 | 상태 |
|---|---|---|
| 흑연 (천연) | 97.2% | 묶임 — FEOC 유예 2026년 말 종료 |
| 인듐 | 94.2% | 묶임 — 중국이 세계 생산의 약 70% |
| 텅스텐 | 69.8% | 묶임 |
| 갈륨 | 73.6%(2024) → 26.0%(2025) | 다변화 성공 — 독일·미국·일본이 분담 |
| 게르마늄 | 59.3% → 14.8% | 다변화 성공 — 캐나다가 70.7% 공급 |
출처 : 한국무역협회 · 디플로맷 · 미국 지질조사국(USGS). 흑연은 천연흑연 기준(인조흑연은 95.3%).
미국이 가진 무기는 원유, LNG, 달러 금융시스템, 반도체 장비, AI 기술입니다. 중국이 가진 무기는 희토류, 흑연, 갈륨·게르마늄, 배터리 소재, 핵심광물 정제능력입니다.
미국은 이란산 원유를 구매하는 중국 정유업체까지 제재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희토류와 배터리 소재에 수출통제를 걸고 있습니다. 양쪽 모두 자신이 가장 강한 공급망을 상대에 대한 협상 카드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의 상황을 '상호 공급망 무기화'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맺으며
Drill, baby, drill. 겉으로 보면 오래된 석유산업의 구호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 뒤에서 벌어지는 변화는 훨씬 큽니다.
미국은 세계 최대 산유국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에너지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란·베네수엘라 등의 원유 거래망을 자신의 금융·제재체계 안에서 관리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면 중국은 자신이 압도적인 경쟁력을 가진 핵심광물의 정제·가공 능력을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21세기의 패권경쟁은 '석유냐 전기차냐'의 싸움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석유와 LNG를 가진 미국, 핵심광물과 정제능력을 가진 중국이 서로의 공급망을 얼마나 흔들 수 있는가의 싸움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한국은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 미국은 우리의 핵심 동맹이자 중요한 수출시장입니다. 중국은 우리의 제조업 공급망과 깊게 연결돼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기업의 답은 단순한 '탈중국'도, 무조건적인 '미국행'도 아닐 겁니다.
당장 눈앞의 시간표부터가 그렇습니다. 흑연 FEOC 유예 종료까지 약 4개월. 중국 배터리 소재 통제 유예 종료도 올해 11월. 반도체 연간 라이선스의 첫 갱신. 이 시간표 위에서 어떤 기업이 준비돼 있고 어떤 기업이 노출돼 있는지가 갈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앞으로 가장 중요한 경쟁력은 이것입니다. 중국이 없어도 돌아갈 수 있고, 미국의 정책이 바뀌어도 버틸 수 있으며, 동시에 두 시장 모두에서 사업할 수 있는 공급망.
과거에는 가장 싼 공급망을 가진 기업이 승리했습니다. 앞으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가장 끊어지지 않는 공급망을 가진 기업이 승리하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 본 글은 2026년 8월 11일까지 공개된 언론 보도와 정부·기관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주요 출처: 미 에너지정보청(EIA), 국제에너지기구(IEA) Critical Minerals Outlook, 미 재무부(OFAC), 로이터, 블룸버그, 한국무역협회, 미국 지질조사국(USGS), 디플로맷.
※ 미국·중국의 수출 통제와 보조금·허가 규정은 정부 결정에 따라 언제든 변경될 수 있으며, 특히 흑연 FEOC 유예의 연장 여부와 중국 배터리 소재 통제의 시행 범위는 현재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 본 글은 정보 공유 목적이며 특정 종목에 대한 매수 또는 매도 권유가 아닙니다.